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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9 19:29:00
글쓴이 : 불멸의이순신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이순신은 덕수이씨 12대 손이다.
그의 시조인 이돈수(李敦守)는 고려중엽 고종 때 신호위 중랑장(神虎衛 中郞將)의 벼슬을 지냈으며 그 선조는 나타나지 않고 다만 1218년 거란의 침입 때 출정한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다.
4대조 때 조선왕조의 개칭을 맞이하면서 문반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 조선시대에 105명의 문과급제자와 정승 7명, 대제학 5명, 공신 4명, 청백리 2명을 낸 덕수이씨는 중종에서 영조 때까지의 3백년간이 가장 융성을 누린 시기로 나타나고 있다.

7대조인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증조부인 이거(李據)는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한 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이조 좌랑 등 청요직을 역임하면서 엄격한 탄핵과 간쟁을 서슴지 않아 ‘호랑이 장령’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순신의 조부 이백록(李百祿)은 기묘사화에 연루돼 고난을 겪었다.
이로 인해서 아버지 이정(李貞)은 벼슬에 뜻이 없이 평민으로 지냈다. 때문에 집안 형편은 더욱 기울어졌다. 하급 무관직인 병절교위(秉節校尉)를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는
정규관리가 아니라 임시직이나 명예직쯤으로 여겨진다.


이순신의 어머니는 초계 변씨(卞氏)이다.
이순신의 형제로는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 등 4형제가 있다.

(이순신 소개)
덕수이씨 종중에서는 이순신과 이율곡(栗谷) 그리고 이식(李植 : 1584 ~ 1647) 등 몇몇
집안을 명문으로 치고 있지만, 이순신과 이율곡은 제 4대 조상 때에 나누어져 이순신은
제 12대가 되고, 이율곡은 제 13대가 되어 두 사람의 촌수는 19촌 숙질간이 되며, 이율곡과 이식은 이율곡의 증조부 때에 서로 나누어져 이식은 제 15대가 되고, 이순신은 이식의 먼 증조 뻘이 된다.
(임진왜란)
조선왕조가 지킨 외교정책의 기본 노선은 명(明)과 사대(事大)관계를 유지하며, 일본·여진 등과는 교린관계를 갖는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태종(太宗, 제3대 왕, 1397~1450)때 웅천(熊川) 개항을 시작으로 하여 세종(世宗, 1397~1450)때는 삼포(三浦 : 부산포, 내이포, 염포)를 개항하였다.
그러나 삼포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폭동으로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고 곧 조정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로 인해 그곳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추방되었으며 양국의 교통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일본 측이 거듭 수교에 대한 요청을 해왔고 조선은 내이포만을 개항하여 교류가 유지될 수 있었다.

국내외의 정세변화에 따라 고려 말 이래 극성을 부리던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에는 다소 진정 기미를 보이는 듯하였다. 하지만 중종조 17년과 18년의(1523)의 침입, 39년(1544)의 사량왜변(蛇梁倭變), 명종 10년(1555)의 을묘왜변(乙卯倭變) 등 대략 10년을 주기로 왜구의 침략은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을묘왜변 이후 조선과 일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거의 외교를 단절한 상태였고, 조선은 일본의 국내 사정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지냈다.

한편 조선은 정치와 경제면에서 혼란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연산군 집권 이후 명종 대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의 사이의 계속된 당쟁으로
인해, 정치 기강은 해이해지고, 전제(田制)와 세제(稅制)의 문란 등 여러 곳곳에서 폐단이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중앙에서의 당쟁은 곧 지방으로까지 번져 국내는 정치적 불안 속에 놓여 있었으며, 부당한 관리 임명에 따른 시정의 문란으로 조정을 향한 백성들의 민심은 이미 떠났다. 더구나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노력과 관심은 찾아볼 수 없어 각 군영의 병기들은 녹슬고 있는 실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실정을 파악한 조정이나 일부 정치인들이 이에 대한 시정과 방비에 관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이 명령은 형식적으로만 행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 후 나라 안팎의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조정에서는 여진족(女眞族)이나 일본의 군사적 침입에 대비한다는 뜻에서 비변사(備邊司)를 상설기관으로 설치하여 국방에 대한 강력한 방비책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1583년(선조16년)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지만, 태평 속에서 당쟁에만 몰두하던 관리들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다.

이와 같은 조정의 무능과 부패는 당시의 수군과 육군을 막론한 일선 지휘관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었다. 이들 지휘관들은 외형상의 위용만을 유지하는데 만족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군사들의 전투준비와 군비의 유지 등에 태만하여 변방은 무방비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명(明)나라는 16세기에 들어서면서 무종(1506~1515)의 사치와 유흥, 라마(Lama)에 대한 광신 등으로 정치는 환관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혼란하기만 했다.
그 뒤에 세종(1522~1566)의 강력한 정치개혁 의지에 따라 전대의 폐정을 일소하고 인사제도를 쇄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정책이 보수 귀족세력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치였으므로 신진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 치열한 정쟁을 불러들여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 뒤는 목종(1567~1572)에 이어 신종(1573~1619)이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을 재상으로 기용함으로써 정치·경제·국방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의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래서 신종의 중흥정치를 이룰 수 있었으나, 1582년에 장거정이 죽자, 신종의 사치와 방탕으로 국고가 비게 되었고, 왜구침략이 잦고 또 몽고족의 침입으로 국방의 쇠퇴가 가속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일본은 전국시대(戰國時代)라는 군웅할거의 전란을 통해 직전신장(織田信長, 오다 노부나가)이 통일의 기반을 잡았다. 하지만 직전신장이 그의 부하였던 명지광수(明智光秀,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암살되고 곧 이어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1590년에 국내를 통일하였다.
풍신수길은 일본의 통일사업을 추진하면서 1585년에 관백(關白)이 되었고, 1586년에 대정대신(大政大臣)의 자리에 올라 천황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했다. 이미 자신이 중앙의 권력을 장악한 이상 지방에 분산된 독자적인 세력들은 커다란 장애로 여겨졌다. 그는 봉건적 지배집단인 다이묘(大名)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 결과 자국 내 세력간의 소모적인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으며, 이에 따라 명나라를 정벌하려는 해외원정사업을 계획하고, 그 사업에 다이묘들의 군사력을 동원하고 집중시키려 했다







당시 일본은 포르투갈·스페인 등 서양 세력의 동진과 개항으로 서양 문물이 막힘없이 전래되었다. 특히 포르투갈인들의 내항으로 철포(鐵砲, 조총)가 전래되었고, 단병접전(短兵接戰 : 짧은 무기를 가지고 적과 맞붙어 싸우는 방식)에 능한 사무라이들로 이루어진 종래의 전투집단보다 조총으로 무장한 보병집단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예수회의 전래도 일본 사회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는데,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같은 독실한 신자가 생겨났고, 조선 침략군 중 약 2,000명이 영세를 받은 신자 병사였다.
그런 한편 풍신수길은 대외침략 계획을 계속해서 이행해 나가고 있었다. 1591년 정월에는 전국에 군량·병선·군역의 수를 할당하였다. 또한 구주(九州)의 한 어촌이던 명호옥(名護屋)에 지휘본부를 설치하고 성을 쌓아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다음해인 임진년 정월에는 수륙 침공군의 편성을 마쳤으며, 3월 재편하였다. 이를 살펴보면 육군은 침공군인 1번대에서 9번대까지 총 158,700명이었고, 명호옥을 비롯한 일본 국내 잔류 병력은 118,300여 명이었다. 이 중 선봉대로 최전선에 투입된 병력은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주장으로 하는 1번대,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주장인 2번대, 흑전장정(黑田長正)의 3번대였다. 구귀가륭(九鬼嘉隆)·협판안치(脇坂安治)·가등가명(加藤嘉明)·등당고호(藤堂高虎) 등은 별도 수군으로 편성하였다. 조선 침략군은 치밀한 침공계획 아래 중간거점인 대마도로 속속 집결하였다. 풍신수길은 이들에게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는 한 필의 군마도 손실하여서는 안 된다.”고 엄명을 내렸다. 이렇게 일본 침략군은 대마도에서 침공의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앞서 풍신수길은 대마도주를 중간에 두고 수차례 통신사 파견을 조선에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은 선조 22년(1589) 9월 황윤길, 김성일, 허성 등의 통신사를 파견하였고, 그들은 풍신수길을 만난 뒤 선조 24년 정월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대립은 통신사의 보고에서도 나타났다. 정사(正使)이자 서인이었던 황윤길은 보고 결과를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병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사(副使)이자 동인이었던 김성일의 보고는 이와 정반대였다. 그의 말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조짐은 전혀 없으며, 풍신수길 역시 두려워할만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 서장관 허성은 동인이었으나 황윤길과 의견을 같이 했고 김성일을 수행했던 황진 역시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이들의 보고에 따라 조선은 국론만 분분하다가 뒤늦게 방어책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첫째로 각 도의 성곽을 수축하게 하였고, 둘째로 무기를 점검케 하였으며, 셋째로 무신 중에 뛰어난 자질을 갖춘 사람은 서열에 관계없이 발탁하였다.
조정에서는 왜군이 육전(陸戰)보다는 수전(水戰)에 능하다는 판단 아래 전국, 그 중에서도 경상·전라도의 성곽 수축에 주력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일부 사대부들은 왜군은 결코 침공해 오지 않는다며 극력 반대하였고, 성곽 보수나 군사 훈련에 동원된 백성들은 지방통치관인 수령과 군사지휘관인 병사(兵使)에게 원망을 품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보(城堡)의 보수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고, 200여 년간 외침 없이 살아 온 사람들의 전쟁준비는 원성만 살 뿐 왜군의 침입에 대한 방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다만 서열에 관계없이 인재를 발탁한 결과, 이순신·권율·원균 등을 기용하게 된 것은 수확이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이후 큰 외적의 침입 없이 200여 년간 태평시대를 구가해 왔기에 왜구의 침입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더욱이 바다 건너 일본이 전국력을 동원하여 침략해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승리보다 더욱 갚진 패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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